조선시대 외국文化(문화)의 창구, 왜관(倭館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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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22-12-16 06:38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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입항소는 그 후 염포(鹽浦, 지금의 울
산)가 추가되어 왜관은 `삼포 왜관`으로 불렸다. 한편, 왜관에는
日本(일본)인을 맞아들이기 위한 조선의 관리가 파견되었고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그 주위
에 옮겨와 살았다고 한다. 그래서 이제 왜관은 단순한 숙박장소라기보다는
조일 무역의 거점인 `상관(商館)`으로서의 기능을 겸하게 되었고, 또한 다수의 日本(일본)인
을 수용하는 거주지구의 기능도 갖게 되었다.
그러나 日本(일본)에서 건너온 사람 가운데 귀국하지 않고 왜관에 머물러 물품의 거래에
종사하면서 왜관 가까이에 집을 마련하여 처자와 함께 영주하는 자가 증가하게 되었
다.
레포트/인문사회
그 결과 조선정부는 日本(일본)인이 입항할 수 있는 곳을 부산포(富山浦, 지금의 부산)와
제포(薺浦, 지금의 웅천)로 정하고 각각에 응접의례에 필요한 시설을 설치하여 그들을
접대토록 하였는데, 이것이 `왜관`의 처음 이었다. 자성대
서쪽에 배 정박지가 있었고 그 북쪽에 영빈관 격인 왜관이 있었다. 日本(일본)인 가구 수 36호, 인구 131명이었던
울산 염포의 日本(일본)인 마을은 오늘날에는 현대자…(To be continued )
조선시대 외국文化(문화)의 창구, 왜관(倭館)
그 결과 조선정부는 일본인이 입항할 수 있는 곳을 부산포(富山浦, 지금의 부산)와 제포(薺浦, 지금의 웅천)로 정하고 각각에 응접의례에 필요... , 조선시대 외국문화의 창구, 왜관(倭館)인문사회레포트 ,
그 결과 조선政府(정부)는 日本 인이 입항할 수 있는 곳을 부산포(富山浦, 지금의 부산)와
,인문사회,레포트
제포(薺浦, 지금의 웅천)로 정하고 각각에 응접의례에 필요..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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설명
순서
다. 그러나 삼포에 위치한 왜관은 쓰시마정
벌(1419), 삼포왜란(1510), 사량진왜변(1544) 등 조일간의 격한 history(역사) 의 흐름 속에서 증설,
이전 혹은 폐쇄를 반복하게 되어 16세기 중반에는 부산포 1개소로 한정되는 선례가 정
착되었다.
삼포개항 초기 부산포의 日本(일본)인 거리는 부산항의 동북쪽, 자성대(子城臺)라고 불리
는 작은 산 동쪽에 있었는데, 항시 거주하는 왜의 가구가 67호이고 남녀노소 합쳐서
323명이었다고 한다. 그리고 상경하는 日本(일본) 사신들을 위해
서는 수도 한양에 별도로 동평관을 설치하여 접대하였다. 지금으로부터 570년 전의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부산포에는 300
여 명이 사는 日本(일본)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고, 日本(일본)인 절까지 세워져 있었다. 그 수는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남녀 약 3,000명 이상이 되었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
의 日本(일본)인촌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.